이마무라 쇼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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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마무라 쇼헤이는 일본의 영화 감독으로, 일본인의 본성과 사회의 어두운 면을 탐구하는 작품으로 유명하다. 그는 와세다 대학교를 졸업하고 쇼치쿠에 입사하여 오즈 야스지로의 조감독을 거쳐 닛카츠로 이적한 후 1958년 감독 데뷔했다. 그의 작품은 자연주의 리얼리즘을 바탕으로 하며, 특히 여성의 육감적인 면을 강조하고 사회의 주변부 사람들의 삶을 조명했다. 이마무라는 칸 영화제에서 두 차례 황금종려상을 수상했으며, 1975년에는 일본 영화 대학을 설립하여 후진 양성에도 힘썼다. 2006년 79세의 나이로 사망했으며, 그의 유작은 옴니버스 영화의 한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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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마무라 쇼헤이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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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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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이마무라 쇼헤이 (今村 昌平) |
로마자 표기 | Imamura Shōhei |
별칭 | 이마헤이 |
출생 | 1926년 9월 15일 |
출생지 | 일본 도쿄도 |
사망 | 2006년 5월 30일 |
사망지 | 일본 도쿄도 |
국적 | 일본 |
직업 | 영화 감독, 각본가, 영화 프로듀서 |
활동 기간 | 1951년 ~ 2002년 |
학력 | 와세다 대학 |
장르 | 영화 (일본 영화) |
가족 | 장남: 덴간 다이스케 차남: 이마무라 고스케 |
영화 경력 | |
활동 내용 | 일본 뉴 웨이브 |
주요 작품 | 일본 곤충기 신들의 깊은 욕망 복수는 나의 것 에에자나이카 나라야마 부시코 (1983년) 검은 비 우나기 간조 선생 |
수상 내역 | |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 | 1983년 나라야마 부시코 1997년 우나기 |
프랑스 영화 기술 고등 위원회상 | 1989년 검은 비 |
일본 아카데미상 최우수 감독상 | 1980년 복수는 나의 것 1990년 검은 비 1998년 우나기 |
일본 아카데미상 최우수 각본상 | 1990년 검은 비 |
일본 아카데미상 회장 특별상 | 2007년 |
블루 리본상 감독상 | 1963년 일본 곤충기 1979년 복수는 나의 것 |
블루 리본상 각본상 | 1963년 일본 곤충기 |
블루 리본상 신인 감독상 | 1958년 도둑맞은 욕정 |
블루 리본상 특별상 | 2006년 |
마이니치 영화 콩쿠르 감독상 | 1963년 일본 곤충기 1979년 인간 증발 |
마이니치 영화 콩쿠르 각본상 | 1968년 신들의 깊은 욕망 |
키네마 준보상 감독상 | 제53회 키네마 준보상 복수는 나의 것 제63회 키네마 준보상 검은 비 |
닛칸 스포츠 영화 대상 감독상 | 제2회 닛칸 스포츠 영화 대상 검은 비 |
가와키타상 | 제15회 가와키타상 |
다카사키 영화제 최우수 작품상 | 1989년 검은 비 |
기타 정보 | |
사후 훈장 | 욱일 소수장 프랑스 공화국 예술 문화 훈장 |
2. 생애
1926년 도쿄부 도쿄시 분쿄구 오쓰카에서 태어나[44][1] 1951년 와세다 대학 제1 문학부를 졸업했다.[1][44] 같은 해 쇼치쿠 오후나 촬영소에 입사하여 오즈 야스지로 감독 밑에서 조감독으로 일했으나,[1][44] 1954년 닛카쓰로 이적했다.[44]
1958년 《도둑맞은 욕정》으로 감독 데뷔 후,[1] 《돼지와 군함》(1961년), 《일본 곤충기》(1963년), 《붉은 살의》(1964년) 등을 통해 인간 본성과 사회 하층민의 삶을 탐구하는 리얼리즘 작풍을 선보였다.[53][57] 1966년 독립 프로덕션 '주식회사 이마무라 프로덕션'을 설립하고[58] 《신들의 깊은 욕망》(1968년) 등 더욱 실험적인 작품을 만들었으며, 다큐멘터리 《가라유키상》(1973년) 등을 통해 일본 군국주의를 비판하기도 했다.[78]
독립 후 재정적 어려움 속에서도[36] 철저한 사전 조사[26][27][28]와 현장 중심의 제작 원칙[32][33][34][35]을 고수했으며, 그의 작품은 '중희극(重喜劇)'[25]으로 불렸다. 1975년에는 요코하마 방송 영화 전문 학원(현 일본 영화 대학) 설립에 참여하여 후진 양성에도 힘썼다.[22][23]
1979년 《복수는 나의 것》으로 성공적인 복귀 후, 《나라야마 부시코》(1983년)와 《장어》(1997년)로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을 두 차례 수상했다.[63][73] 이후 《검은 비》(1989년), 《간장 선생》(1998년) 등을 발표했다.
개인적으로는 가부장제적 성향이 있었고[22], 대식가였으나[38][39] 당뇨병을 앓았다.[41] 가족으로는 아내와 2남 1녀를 두었으며, 장남 텐겐 다이스케와 차남 이마무라 히로스케 모두 영화계에 종사했다.[24] 2006년 5월 30일, 전이성 간 종양으로 79세에 사망했다.[77] 유작은 옴니버스 영화 《11'09''01/9월 11일》(2002년) 중 단편이다.
2. 1. 초기 생애 (1926-1951)
1926년 도쿄부 도쿄시 분쿄구 오쓰카에서 이비인후과를 개업한 의사의 3남 1녀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44][1] 그의 아버지는 효고현 가토군 도조촌 출신으로 도쿄 제국 대학 의학부를 졸업하고 교바시에서 이비인후과 의원을 운영했다.[44] 어머니는 홋카이도 오타루시 어부의 딸이었다.[44][45] 초등학교 시절에는 배우 기타무라 가즈오와 동급생이었고, 아버지와 함께 요세나 영화를 자주 보러 다녔다.[44] 그의 큰형은 "금요회"라는 극단에 소속되어 있었으나, 제2차 세계 대전 중 필리핀에서 전사했다.[44]1944년 (쇼와 19년) 도쿄 고등 사범학교 부속 중학교(현: 쓰쿠바 대학 부속 중학교·고등학교)를 졸업했다.[44] 중학교 동기로는 소설가 호시 신이치, 쓰치다 미쓰후미 (무사시노 대학 명예 교수), 오노 기미오 (전 홋카이도 정보 대학 학장), 영화 감독 고다마 스스무, 구로사와 히로시 (전 일본흥업은행 회장), 호시노 에이이치 (도쿄 대학 명예 교수) 등이 있다.[44]
태평양 전쟁 말기, 징병을 피하기 위해 기류 고등공업학교(현: 군마 대학 공학부)에 입학했으나, 종전 후 바로 퇴학했다.[44] 전쟁이 끝난 후 잠시 동안 담배와 술을 판매하는 암시장에 관여하기도 했다.[1] 이후 와세다 대학 제1 문학부 서양사 학과에 입학했다.[1][44] 대학 시절에는 연극부에 소속되어 연극 활동에 몰두했으나,[44]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영화 『취한 천사』(1948)에 감명받아 연극에 실망하고 영화 감독의 길을 걷기로 결심했다.[44] 특히 1950년에 본 구로사와의 영화 『라쇼몽』은 전후 일본 사회에서 가능한 새로운 표현의 자유를 보여준 작품으로, 그에게 초기 영감을 주었다.[4]
구로사와 아키라를 따라 도호에 들어가려 했으나, 당시 도호는 조감독을 모집하지 않았다.[44] 1951년 와세다 대학 제1 문학부를 졸업하고,[1][44] 마침 조감독 결원이 생겨 처음으로 공모를 실시한 쇼치쿠 오후나 촬영소에 지원했다. 2,000명의 지원자 중 8명 안에 들어 합격하여 쇼치쿠에 입사하며 영화계 경력을 시작했다.[1][44]
2. 2. 쇼치쿠 시절 (1951-1954)
1951년 와세다 대학 제1 문학부를 졸업하고 쇼치쿠 오후나 촬영소에 입사했다.[1] 당시 쇼치쿠가 처음 실시한 조감독 공모에서 2000명의 지원자 중 8명 안에 들어 합격했다. 쇼치쿠에서는 주로 오즈 야스지로 감독 밑에서 조감독으로 일하며, 《동경 이야기》(1953) 등의 제작에 참여했다.[1]이마무라는 오즈 감독이 영화 속에서 일본 사회를 묘사하는 방식이나 배우들을 엄격하게 통제하는 연출 스타일에 대해 불편함을 느꼈고 불만을 가졌다.[4][1] 그는 훗날 쇼치쿠 시절을 "속박투성이였다"고 회고하며, 당시의 수입이나 일에도 만족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마무라는 오즈 감독으로부터 영화 제작에 필요한 기술적인 지식을 많이 배웠음을 인정하기도 했다.[3]
쇼치쿠 오후나 조감독부 간사까지 지냈으나, 결국 1954년 쇼치쿠를 떠나 닛카쓰로 이적했다. 쇼치쿠 시절, 쇼치쿠 오후나 촬영소에서는 덮밥을 두 그릇씩 먹는 대식가 신인으로 알려지기도 했다.[40]
2. 3. 닛카쓰 시절 (1954-1965)
1954년 쇼치쿠를 떠나 닛카쓰에 입사하여 가와시마 유조의 조감독으로 활동했다. 도널드 리치에 따르면, 이마무라는 가와시마와 함께 오즈 야스지로, 미조구치 겐지, 만년의 구로사와 아키라 영화에서 그려진 '공식적인' 일본과는 다른, '비문명적'이고 비도덕적인 인물을 통해 '진짜' 일본을 묘사하는 데 같은 관심을 가졌다.[5] 또한 가와시마의 영화 ''막말태양전''(1957)의 각본을 공동 집필하기도 했다.[6]1958년, 닛카쓰에서 감독으로 데뷔했으며, 첫 작품은 ''도둑맞은 욕정''이다. 이 영화는 가부키와 스트립쇼를 결합한 순회 극단을 다루며, 조나단 로젠바움은 "저속함 속에서 활력을 찾아내는" 특징이 있다고 평했다.[7] 이후 스튜디오의 요구에 따라 프랭크 나가이의 유행가를 기반으로 한 코미디 ''니시 긴자 역''과 블랙 코미디 ''끝없는 욕망'' 등을 연출했다.[8][9] 1959년에는 가난한 탄광촌의 재일 한국인 공동체를 그린 ''나의 두 번째 형''을 만들었는데, 알렉산더 제이코비는 이 영화를 "이례적으로 부드러운 영화"라고 평가했다.[2]
1961년에는 풍자 영화 ''돼지와 군함''을 연출했다. 이마무라 본인이 항상 만들고 싶었던 영화라고 언급한 이 작품은[3] 요코스카를 배경으로 미군과 현지 야쿠자 간의 암거래를 그렸다. 그러나 영화의 논쟁적인 내용[10]과 제작 시간 및 예산 초과 문제로 인해[11] 닛카쓰는 이마무라에게 2년간 연출을 금지하고 각본 작업에만 전념하게 했다.[11][51] 이 영화의 각본 작업 중 오즈 야스지로와 각본가 노다 다카고로부터 "너희는 왜 구더기 같은 것만 쓰냐"는 비판을 받자, 이마무라는 "이 젠장할 늙은이들!"이라고 독설을 퍼붓고 이를 계기로 "나는 평생 죽을 때까지 구더기만 그려주겠다!"라고 굳게 결심했다고 한다.
2년의 공백기 후 1963년, ''일본 곤충기''로 연출에 복귀했다. 야마가타현에서 배우, 스태프와 합숙하며 올 로케이션 촬영과 동시 녹음을 시도했고,[52] 과감한 성 묘사로 화제를 모아,[53][54][55] 배급 수입 3.5억엔을 기록하는 큰 성공을 거두었다.[56] 이 영화는 제14회 베를린 국제 영화제 경쟁 부문에 초청되었고, 주연 배우 히다리 사치코는 은곰상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일본 곤충기''의 성공에 힘입어, 이전에 제작이 보류되었던 기획 ''붉은 살의''를 1964년에 완성하여 개봉했다. 이 작품은 이마무라가 자신의 베스트로 인정하는 작품이다.[53][57] ''일본 곤충기''와 ''붉은 살의''는 모두 불행 속에서도 끈질기게 살아남는 여성 주인공을 내세웠다. 이마무라는 미조구치의 ''오하루의 일생''이나 나루세 미키오의 ''부운'' 같은 영화 속 자기희생적 여성상을 비판하며, "그들은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내 여주인공들은 현실적이다"라고 주장했다.[5]
그러나 ''일본 곤충기''와 ''붉은 살의''에서 배역이나 예산, 필름 사용량으로 회사와 충돌하여, ''붉은 살의''를 마지막으로 닛카쓰에서 독립하여 1966년 3월 자신이 대표를 맡는 독립 프로덕션인 이마무라 프로덕션을 설립했다.[58]
2. 4. 이마무라 프로덕션 설립과 독립 영화 (1965-1979)
닛카츠 시절 《일본 곤충기》(1963년), 《붉은 살의》(1964년) 등을 통해 자신만의 작가 세계를 구축한 이마무라는 이후 닛카츠를 나와 독립 프로덕션인 '주식회사 이마무라 프로덕션'을 설립하고 대표 이사를 맡았다.[21] 이 시기부터 그는 인간과 사회의 저변을 탐구하는 작품들을 더욱 본격적으로 선보였다.독립 후 초기 작품으로는 《에로사들보다 인류학 입문》(1966년)과 《신들의 깊은 욕망》(1968년) 등이 있다. 이 작품들에서 그는 여전히 인간의 본능적인 모습과 일본 사회의 기층 문화에 대한 깊은 관심을 다큐멘터리적인 방식으로 그려냈다. 스스로를 문화 인류학자로 여긴 그는 "나는 지저분한 영화를 만드는 것을 좋아한다"[16]고 말할 정도로, 사회의 밑바닥과 인간의 원초적인 욕망 탐구에 집중했다. "나는 인간 신체의 하부와 사회 구조의 하부의 관계에 관심이 있다... 나는 인간을 다른 동물과 구별하는 것이 무엇인지 자문한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나는 영화를 계속 만들면서 그 답을 찾는다"[17]는 그의 말은 이러한 작가적 지향점을 잘 보여준다.
그러나 독립 프로덕션 운영은 순탄치 않았다. 자신의 집을 저당 잡혀 제작 자금을 마련해야 했고, 제작비를 회수하고 저당권을 해제하기까지 약 3년이 걸려 작품 발표 주기가 길어질 수밖에 없었다.[36] 검약가로 알려진 그는 필름 사용에는 관대했지만 제작비를 줄이기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였으며, 전화 요금을 아끼기 위해 엽서 사용을 권장할 정도였다.[37] 특히 1970년대에는 극영화 제작에 어려움을 겪으며 다큐멘터리 작업에 집중하기도 했는데, 이 시기 아내가 애니메이션 채색 하청 일을 하며 가계를 꾸려나갔다.[24] 이 시기에 제작된 다큐멘터리 《가라유키상》(1973년)은 동남아시아에 성 노동자로 보내졌던 일본 여성들의 비극적인 삶을 조명하며 일본 군국주의의 어두운 이면을 비판적으로 다루었다.[78]
이러한 어려움 속에서도 이마무라는 자신만의 제작 원칙을 고수했다. 철저한 사전 조사는 그의 트레이드마크였다. 《붉은 살의》 제작 시에는 미야기현의 12가구를 조사했고[29], 《일본 곤충기》를 위해서는 매춘부와 알선업자를 취재한 노트가 3권에 달했으며[30], 《에로사들보다 인류학 입문》을 위해서는 포르노 영화 제작자를 직접 만나기도 했다.[30] 이러한 조사광적인 면모는 1979년 작 《복수는 나의 것》 제작 과정에서도 유감없이 발휘되어 원작자 사키 류조를 놀라게 할 정도였다.[31] 또한, 그는 기본적으로 모든 장면을 실제 장소에서 촬영하는 올 로케이션을 선호했으며, 배우와 스태프들이 로케이션 장소에서 장기간 합숙하며 촬영하는 방식을 고집했다. 배우의 다른 작품 동시 출연도 허용하지 않았으며[32][33], 후시 녹음을 싫어하고 현장감 있는 동시 녹음을 중요하게 생각했다.[34][35]
한편, 이 시기는 일본 영화계의 촬영소 시스템이 붕괴되던 때이기도 했다. 대형 영화사들이 신인 감독 발굴과 육성을 중단하면서 인재 공급에 어려움을 겪게 되자, 이마무라는 교육자로서의 면모를 보이기도 했다. 그는 자신의 프로덕션에 하세가와 카즈히코와 같은 젊은 영화인을 받아들여 키워냈으며[21], 1975년에는 영화인 육성을 목표로 하는 요코하마 영화 전문 학원 (이후 일본 영화 학교를 거쳐 일본 영화 대학의 모체가 됨) 설립에 참여하여 일본 영화계의 인재 양성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22][23]
2. 5. 복귀와 전성기 (1979-2002)
《복수는 나의 것》(1979년)을 영화화할 때도 그의 철저한 조사 스타일은 여전하여 원작자 사키 류조를 놀라게 했다.[31] 이 시기 이마무라는 독립 프로덕션인 주식회사 이마무라 프로덕션을 통해 영화 제작을 이어갔다.[21] 자신의 집을 저당 잡혀 제작 자금을 마련했기 때문에 제작비 회수에 시간이 걸려 발표 주기는 3년에 한 편 정도였다.[36] 제작비를 아끼기 위해 라면 외에는 사치를 부리지 않는 등 검소한 생활을 했다고 전해진다.[37]1970년대 촬영소 시스템 붕괴 이후 영화사의 인재 육성이 중단된 상황에서, 그는 교육자로서의 면모를 보여 요코하마 영화 전문 학원(이후 일본 영화 학교, 일본 영화 대학의 모체)을 창립하여 하세가와 카즈히코 등 후진 양성에 힘썼다.[22][23]
이 시기는 이마무라 쇼헤이의 전성기로 평가받으며, 칸 영화제에서 두 번이나 최고상(황금종려상)을 수상하는 쾌거를 이루었다. 또한 이전 시기의 《가라유키 상》(1973년)에 이어 《간장 선생》(1998년) 등을 통해 일본 군국주의를 비판하는 작업을 꾸준히 이어갔다.[78]
만년에는 고령과 당뇨병의 영향으로 과거의 에너지가 넘치던 모습과 달리 과묵해진 모습을 보였다.[43]
2. 6. 후기 (2002-2006)
만년에는 고령에 더해 당뇨병의 영향으로 에너지가 넘치던 이마무라는 부쩍 과묵해졌다.[43] 애연가였지만 금연했다.[38]3. 작품 세계
이마무라 쇼헤이는 자신의 작품을 통해 일본인의 밑바닥에 깔린 신앙, 욕정, 충동과 같은 인간의 본능적인 측면을 집요하게 파고들었다.[17][16] 그의 영화는 종종 '중희극'(重喜劇)이라 불리며[25], 이는 삶의 어둡고 비극적인 면과 희극적인 요소를 동시에 담아내려는 그의 독특한 작풍을 나타낸다. 이러한 작품 세계는 철저한 자연주의 리얼리즘과 집요한 사전 조사를 바탕으로 구축되었다.[26][27][28]
쇼치쿠, 닛카츠와 같은 대형 영화사를 거쳐 독립 프로덕션인 '이마무라 프로덕션'을 설립하여 활동했으며, 50여 년의 감독 생활 동안 20편의 장편 영화를 남겼다. 그는 《나라야마 부시코》(1983)와 《우나기》(1997)로 칸 영화제에서 최고상인 황금종려상을 두 번이나 수상하며 국제적으로도 높은 평가를 받은 일본의 대표적인 영화 감독 중 한 명이다.
그의 구체적인 작품 주제와 특징, 촬영 방식, 그리고 작품 속 여성관 등에 대해서는 아래 하위 섹션에서 더 자세히 다룬다.
3. 1. 주제와 특징
이마무라 쇼헤이의 작품은 일본인의 근원적인 신앙, 욕정, 충동 등 인간의 본능적인 측면을 깊이 파고드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스스로를 '문화 인류학자'로 여기며, "나는 인간 신체의 하부와 사회 구조의 하부의 관계에 관심이 있다... 나는 인간을 다른 동물과 구별하는 것이 무엇인지 자문한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나는 영화를 계속 만들면서 그 답을 찾는다"[17]고 말할 정도로 인간과 사회의 근본적인 문제에 천착했다. 또한 "나는 지저분한 영화를 만드는 것을 좋아한다"[16]고 공언하며, 미화되지 않은 날것 그대로의 인간 군상을 스크린에 담아내고자 했다.그의 작품 스타일은 '중희극'(重喜劇)이라고 불리는데, 이는 단순한 코미디를 넘어 삶의 비극성과 희극성을 동시에 담아내려는 이마무라 감독 고유의 작풍을 나타내는 조어이다[25]. 이러한 작풍은 철저한 자연주의 리얼리즘에 기반하며, 각본 집필 단계에서부터 집요할 정도의 조사를 거치는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26][27][28]. 예를 들어 《붉은 살의》 제작 시에는 미야기현의 12가구를 직접 조사했고[29], 《일본 곤충기》를 위해서는 매춘부와 알선업자를 취재한 노트가 3권에 달했으며, 《에로사들보다 인류학 입문》 촬영 전에는 블루 필름 제작자를 직접 만나 인터뷰하기도 했다[30]. 이러한 조사광적인 면모는 《복수는 나의 것》을 영화화할 때도 발휘되어 원작자 사키 류조를 놀라게 할 정도였다[31].
촬영 방식에서도 리얼리즘을 추구하여, 기본적으로 올 로케이션 촬영을 원칙으로 삼았다. 배우와 스태프들은 촬영지에서 장기간 합숙하며 생활했고, 배우의 겸임 출연은 허용되지 않았다[32][33]. '귀신 이마헤이'라고 불릴 정도로 타협 없는 끈질긴 연출 스타일을 고수했으며, 후시 녹음(아후레코)을 싫어하고 현장감 있는 동시 녹음을 고집했다[34][35].
이마무라는 쇼치쿠, 닛카츠 등 대형 영화사를 거쳐 독립 프로덕션인 '이마무라 프로덕션'을 설립하여 활동했다. 독립 제작 환경은 자유로운 창작을 가능하게 했지만, 제작비 조달의 어려움을 동반했다. 그는 자신의 집을 저당 잡혀 제작 자금을 마련하는 경우가 많았고, 이 때문에 제작비를 회수하고 저당권을 해제하기까지 3년 정도가 걸려 작품 발표 주기가 길어지는 경향이 있었다[36]. 이러한 환경 속에서 그는 철저한 검약 정신을 발휘하여, 필름 사용에는 관대했지만 제작비를 줄이기 위해 다른 모든 부분에서 비용을 아꼈으며, 사치라고는 라면을 먹는 정도였다고 전해진다[37].
그의 스승은 영화 감독 가와시마 유지였는데, 이마무라는 항상 가와시마를 의식하며 자신만의 독자적인 작품 세계를 구축해 나갔다. 도시 지향적이었던 가와시마와 달리, 이마무라는 도호쿠 지방의 토착적인 정서, 즉 '기층 심리'에 주목하며 이를 바탕으로 한 '중희극' 스타일을 확립했다. 그의 영화는 다큐멘터리적인 터치를 보이기도 했지만, 주인공은 언제나 평범한 서민이었으며, 유명인의 전기나 역사적인 사건을 직접적으로 다루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또한, 많은 작품에서 여성을 육감적으로 묘사했으며 누드 장면이 자주 등장하는 특징을 보인다.
성격적으로 가부장제 지향성이 강했다는 평가도 있지만, 이는 교육자로서의 면모로 이어지기도 했다. 그는 영화 감독 하세가와 카즈히코를 발굴하고 키워냈으며[21], 요코하마 영화 전문 학원(이후 일본 영화 학교, 현 일본 영화 대학의 모체)을 창립하여 1970년대 촬영소 시스템 붕괴 이후 침체된 일본 영화계의 인재 양성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22][23]. 그의 장남인 텐겐 다이스케는 아버지를 "돈벌이를 못하는 이상주의자"라고 평하기도 했다.
이마무라 쇼헤이는 칸 영화제에서 최고상인 황금종려상을 두 번이나 수상하며 국제적으로도 높은 평가를 받은 일본의 대표적인 영화 감독 중 한 명이다.
다음은 그의 주요 작품 목록이다.
연도 | 제목 | 비고 |
---|---|---|
1958년 | 《도둑맞은 욕정》 | |
1961년 | 《돼지와 군함》 | |
1963년 | 《일본 곤충기》 | |
1964년 | 《붉은 살의》 | |
1966년 | 《에로사들보다 인류학 입문》 | 원제: 人類学入門 エロ事師たちより일본어 |
1968년 | 《신들의 깊은 욕망》 | |
1970년 | 《호스티스가 말하는 일본 전후사》 | 다큐멘터리 |
1973년 | 《가라유키상》 | 다큐멘터리[83] |
1979년 | 《복수는 나의 것》 | |
1983년 | 《나라야마 부시코》 |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 |
1997년 | 《우나기》 |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 |
1998년 | 《간장선생》 | |
2001년 | 《붉은 다리 아래 따뜻한 물》 |
3. 2. 여성관
이마무라 쇼헤이는 자신의 작품에서 여성을 대체로 육감적으로 묘사하는 것을 선호했으며, 많은 작품에서 여배우의 누드 장면이 등장했다. 이러한 표현 방식은 그의 자연주의 리얼리즘 작풍과 연결되는데, 특히 서민이나 사회 하층민의 삶과 욕망을 솔직하게 그리려는 의도와 관련이 깊다. 예를 들어, 일본 곤충기나 붉은 살의 같은 작품 제작 시에는 철저한 사전 조사를 통해 현실성을 추구했다[29][30]. 개인적으로는 가부장제를 지향하는 성향이 있었다고 알려져 있지만[22][23], 그의 영화 속에서는 종종 강인하고 생명력 넘치는 여성 인물들이 그려지기도 했다.4. 영향 및 평가
이마무라는 칸 영화제에서 최고상인 황금종려상을 두 번 수상한 일본을 대표하는 영화 감독 중 한 명이다.[63][73] 쇼치쿠, 닛카츠를 거쳐 독립 프로덕션인 이마무라 프로덕션을 설립하고 대표를 역임했다. 영화 감독 하세가와 카즈히코가 정사원으로 소속되기도 했다.[21]
교육자로서의 면모1975년, 이마무라는 일본 영화 대학( 日本映画大学일본어 )의 전신인 요코하마 방송 영화 전문학교(横浜放送映画専門学院)를 설립했다.[18] 이는 가부장제적 성향과 맞물려 교육자로서의 면모를 보여준 사례로, 하세가와 카즈히코를 키워냈을 뿐 아니라, 1970년대 촬영소 시스템 붕괴 이후 영화사가 인재 육성을 중단한 상황에서 새로운 인재를 공급하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22][23] 이 학교 출신으로는 미이케 다카시 (이마무라의 1987년작 『자겐』 조감독으로 참여[19]), 호소노 다쓰오키, 김수길, 사사베 기요시, 모토히로 카츠유키, 이상일, 사토 토스케, 정의신 (각본가), 아베 카즈시게 (소설가), 웃찬난찬, 데가와 테츠로 (탤런트), 하세가와 하츠노리, 류 다이스케 (배우) 등 다양한 분야의 인재가 있다. 애니메이션 감독 다니구치 고로 역시 자신이 영향을 받은 인물로 이마무라를 꼽았다.
작품 세계와 연출 스타일이마무라 쇼헤이의 작품은 스스로 "중희극(重喜劇)"이라 칭한 독특한 스타일로 유명하다. 이는 경희극을 비튼 조어로, 그의 작품 세계를 상징한다.[25] 작풍은 자연주의 리얼리즘에 기반하며, 각본 집필 시 철저한 조사를 거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26][27][28] 예를 들어 『붉은 살의』 제작 시에는 미야기현의 12가구를 조사했고,[29] 『일본 곤충기』를 위해서는 매춘부와 알선업자를 취재한 노트가 3권에 달했으며, 『에로사들보다 인류학 입문』을 위해 블루 필름 제작자를 직접 만나기도 했다.[30] 이러한 조사광적인 면모는 『복수는 나의 것』 영화화 과정에서도 발휘되어 원작자 사키 류조를 놀라게 했다.[31]
촬영에 있어서는 기본적으로 올 로케이션을 원칙으로 삼았으며, 배우와 스태프가 로케이션 장소에서 장기간 합숙하며 촬영하는 방식을 선호했고, 배우의 겸임 출연을 허용하지 않았다.[32][33] "귀신 이마헤이(鬼の今平)"라 불릴 정도로 타협 없는 끈기 있는 연출 스타일을 고수했으며, 후시 녹음(아후레코)을 싫어하고 현장감 있는 동시 녹음을 고집했다.[34][35]
스승인 가와시마 유지를 항상 의식하며, 도시 지향적인 가와시마와 대비되는 도호쿠 지방의 토착적인 "기층 심리"를 기반으로 한 작풍을 확립했다. 그의 작품은 다큐멘터리적 색채를 띠기도 했지만, 주인공은 항상 서민이었으며 유명인의 전기나 역사적인 사건은 거의 다루지 않았다. 또한, 여성을 육감적으로 표현하는 것을 선호하여 많은 작품에서 여배우의 누드 장면이 등장했다.
제작 방식과 개인적 면모독립 프로덕션에서 영화를 제작했기 때문에, 집을 저당 잡혀 자금을 마련하는 경우가 많았고, 제작비를 회수하고 저당권을 해제하기까지 3년 정도가 걸려 발표 주기는 3년에 한 편 정도였다.[36] 검약가로 알려져 필름 사용에는 관대했지만, 제작비를 줄이기 위해 다방면으로 노력했다. 사치라고는 라면 정도였으며,[37] 전화 요금을 아끼기 위해 엽서 연락을 권장할 정도였다.
성격적으로는 가부장제를 지향하는 경향이 강했다.[22] 스모 선수 급의 대식가였으나[38][39] 29세에 당뇨병을 앓게 되었고,[41] 치료를 위해 테니스를 즐겼다.[42] 만년에는 고령과 당뇨병의 영향으로 과묵해졌다.[43] 취미는 마작이었다.[38]
평가장남 텐겐 다이스케는 아버지를 "돈벌이를 못하는 이상주의자"라고 평했다. 2006년 이마무라가 사망했을 때, 그를 사숙했던 영화 감독 마틴 스코세지는 "이마무라 쇼헤이 감독은 마스터입니다"라는 조사를 보내 애도를 표했다.[76][77] 그의 작품들은 사회 기층민과 소외된 이들의 삶을 강렬하고 생생하게 그려내며 일본 사회의 이면을 탐구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5. 주요 작품 목록
그의 작품은 일본인의 신앙, 욕정, 충동 등을 표현해냈다.
연도 | 제목 | 감독 | 각본 | 제작 | 비고 |
---|---|---|---|---|---|
1956 | 풍선 | 예 | 제2 조감독 | ||
1957 | 막부 말 태양 | 예 | 조감독 | ||
1958 | 도둑맞은 욕정 | 예 | |||
니시 긴자 역 | 예 | 예 | |||
끊임없는 욕망 | 예 | 예 | |||
1959 | 나의 두 번째 형 | 예 | 예 | 베를린 국제 영화제 경쟁 부문 | |
1961 | 돼지와 군함 | 예 | 각본: 야마우치 히사시 | ||
1962 | 큐폴라가 있는 거리 | 예 | |||
1963 | 사무라이의 아이 | 예 | |||
경륜 상인 행적기 | 예 | ||||
일본 곤충기 | 예 | 예 | 베를린 국제 영화제 여우주연상 (히다리 사치코) | ||
1964 | 붉은 살의 | 예 | 예 | 원작: 후지와라 신지 | |
1966 | 에로사꾼들로부터 인류학 입문 | 예 | 예 | 예 | 원작: 노사카 아키유키 |
1967 | 어느 남자가 사라졌다 | 예 | 예 | 다큐멘터리 | |
1968 | 네온 타헤이키 | 예 | |||
동중국해 | 예 | 예 | 기획 참여 | ||
신들의 깊은 욕망 | 예 | 예 | |||
1970 | 한 여자 술집 주인의 이야기 | 예 | 예 | 텔레비전 다큐멘터리 | |
1971 | 말레이시아 미귀환병 탐색 | 예 | 텔레비전 다큐멘터리 | ||
태국 미귀환병 탐색 | 예 | 예 | 텔레비전 다큐멘터리 | ||
1972 | 부부안의 해적 | 예 | 예 | 텔레비전 다큐멘터리 | |
1973 | 무법자 마츠 귀향 | 예 | 텔레비전 다큐멘터리 | ||
1975 | 가라유키상 | 예 | 텔레비전 다큐멘터리[83] | ||
1976 | 청춘의 살인자 | 예 | |||
1979 | 복수는 나의 것 | 예 | 일본 아카데미상 작품상 & 감독상 | ||
1981 | 에에쟈나이카 | 예 | 예 | 예 | 칸 영화제 초청 작품 |
1983 | 나라야마 부시코 | 예 | 예 |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 일본 아카데미상 작품상 | |
1986 | 맨발의 신을 보셨습니까? | 예 | |||
1987 | 천황의 군대는 진군한다 | 예 | 다큐멘터리, 기획 참여 | ||
자가미 | 예 | 예 | 칸 영화제 경쟁 부문 | ||
1989 | 검은 비 | 예 | 예 | 일부 | 일본 아카데미상 작품상 & 감독상, 칸 영화제 기술대상 |
1997 | 우나기 | 예 | 예 |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 일본 아카데미상 감독상 | |
1998 | 간장선생 | 예 | 예 | 칸 영화제 초청 작품 | |
2001 | 붉은 다리 아래 따뜻한 물 | 예 | 예 | 칸 영화제 경쟁 부문 | |
2002 | '110901 세프템버 11 | 예 | 예 | 옴니버스 영화 중 "일본" 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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